화호 비극의 전모
누가 시화호를 책임져야 하는가
《쓸모 잃은 시화호는 애물단지 되고 공사비 8000억원 들인 새만금호는 없었던 일이 될 운명. 바다 막아 땅과 담수호 만든다던 장밋빛
청사진은 어디부터 잘못 됐나 개방지상주의에 밀려 소중한 자연을 잃어버린 과거로부터 우리는 과연 무엇을 배울 것인가.》
신석호
〈동아일보 신동아부 기자 kyle@donga.com〉
시화호
와 새만금호. 「개발」을 지상과제로 여겼던 우리에게 「환경」이라는 가치를 생각케 하는 이 시대의 화두이자 고민거리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사업은 공정 49% 상태에서 잠정 중단되고 전면 재검토하게 됐다. 또 당초 농업용수로 쓰려던 계획이 백지화된 시화호는
당장 용도가 사라져 「애물단지」가 돼버렸다.
유종근(柳鍾根) 전북지사는 1월11일 『계획대로 새만금 방조제를 건설할 경우 내부 담수호의 수질오염 뿐 아니라 방조제 외곽의 해양
생태계에 심각한 변화가 예상된다』며 『민관 합동조사단을 구성해 사업 전반에 대한 전면 재조사를 벌인 뒤 농어촌진흥공사와 사업
백지화를 포함한 모든 대책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김성훈(金成勳) 농림부장관은 『전북도가 요청하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며
일단 수용의사를 밝혔다.
새만금 종합개발사업은 전북 부안군 변산면 대항리와 군산시 비응도를 잇는 33㎞의 방조제를 쌓아 서울 여의도의 140배에 해당하는
1억2000만평의 땅을 조성하는 사업으로, 91년부터 현재까지 8600억원의 예산이 투입돼 절반이 조금 넘은 18㎞의 방조제가
축조됐다.
새만금사업 재검토 결정은 시화호의 실패에 영향받은 측면이 크다. 농림부는 지난해 12월28일 시화호 간척지에 조성될 농지
1100만평에 대한 농업용수로 시화호 물을 쓰지 않겠다는 방침을 공식 확정했다. 농림부는 대신 시화호에서 11㎞떨어진 경기 화성군
우정면에 방조제를 쌓아 4300만t 규모의 우정호를 만들고, 간척지 농지내에 만들어질 2000만t 규모의 탄도호에서 농수를
공급하겠다는 것. 농림부는 84년 반월만에 12.7㎞의 시화호 방조제를 만들어 여의도의 20배에 이르는 담수호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바로 그 장본인이다.
바다막이를 둘러싸고 벌어진 거대한 국책사업들의 잇따른 회귀현상. 과연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국가의 10년 앞을 내다보지
못했던 전임자들의 실책을 놓고 앞으로 국가를 경영해야 할 후임자들은 무엇을 배우고 반성해야 하는 것일까. 시화호와 새만금호의
운명만큼이나 우리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시화호 주변의 환경 패닉(panic) 현상
1월12일 오전 10시. 경기 안양시에서 좁은 국도를 따라 안산시로 접어들자 눈이 따갑기 시작했다. 차창을 내렸다. 해안에 인접한
공단지역 특유의 매케하고 짠 냄새가 풍겨왔다. 서울울 벗어나면서 기대했던 싱싱한 바다 내음은 없었다.
기자는 시화매립지 주거지구에 있다는 한국수자원공사 사업소를 찾아가고 있었다. 초행이어서 헤매다닌 덕분에 시화호를 둘러싼 반월공단과
시화공단 구석구석을 구경할 수 있었다. 즐비하게 들어선 공장들은 높이 솟은 굴뚝에서 연신 회백색 연기를 내뿜었다.
외곽에서 시화호로 흘러드는 화정천과 안산천, 신길천은 차가운 겨울바람에 얼어 붙었다. 시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작은 지천이었다. 얼음색은 탁한 회색. 개천 곳곳에서는 하수관을 정비하는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다.
『시화호로 흘러드는 빗물과 오수를 한데 모아 시화와 안산하수처리장으로 보내는 관로도 보시구요, 지천을 정화하기 위해 만들고 있는 인공습지도 보셔야죠. 앞으로 정화된 하수에 고기를 키워 환경학습장으로 키울 계획입니다』
95년부터 이곳에 근무해온 강희구(姜熙九) 공사2부장은 96년 시화호 오염이 문제가 되면서 겪었던 악몽이 떠오르는 듯 『지금의 시화호는 당시의 시화호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시화호 최상류에는 인공습지를 만드는 기반작업이 마무리돼 있었다. 시화호로 흘러드는 작은 지천인 반원천과 동화천, 삼화천을 7일
동안 침전지와 갈대밭으로 지나가게 해 정화시킨다는 계획. 수자원공사가 270억원을 들여 만드는 한국 최초의 환경시설이라는
설명이다.
시화호 오염에 주범이었던 「빗물관을 통해 배출되는 폐수」를 막기 위해 반월 안산지역의 8개 빗물 배출구에는 물을 펌프로 퍼올려
관을 통해 하수처리장으로 보내는 시설이 설치됐다. 기자가 한 빗물 배출구에 이르렀을 때, 양심없는 염색업체들은 지금도, 그리고
대낮인데도 빗물 배출구를 통해 폐수를 방류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이런 물 전량이 모두 시화호로 직행했다.
기자와 수자원공사 관계자가 이 장면을 사진기에 담고 있을 무렵 환경부 해양관리청 소속 공익근무요원이 지프를 타고 나타나 당황한
표정으로 황급히 본부에 보고를 했다. 시화호 주변 이곳 저곳에서는 일종의 환경 패닉(panic)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12.7㎞의 방조제 위를 차로 달리는 데만 20분이 걸렸다. 방조제 위에서 본 시화호는 겨울 하늘색보다 파랬다. 방조제 가까운
호수 위에는 어부들이 여기 저기 고기잡이 그물을 쳐 놓았다. 물론 불법이다. 하지만 담수화를 포기하고 바닷물을 수시로 집어 넣어
물이 맑아진 뒤로는 적당히 상한 호수물에서 먹이를 찾으려는 바닷 물고기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한다.
방조제 위에서 바라본 시화호는 한 마디로 바다였다. 말이 여의도 20배지 호수 저편이 아물아물 보이지도 않을 정도. 공단지역에
둘러싸이게 될 어마어마한 바닷물 호수에 조그마한 시골 개천 6개에서 흘러드는 물을 모아 담수호를 만들겠다는 「깜찍한」 생각을 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과거를 비판하면서 현재의 가치와 잣대를 강요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과거에는 과거의 가치와 잣대가 있었고 과거의 사람들은
그 기준에 따라 행동했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가 엄청나게 짧은 시간에 급속한 발전과 가치변동을 겪은 것을 고려하면 우리에게
10여년이라는 시간은 서구의 수백년에 해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문제들이 과거에서 연유된 것이고, 현재의 문제를 미래의 교훈으로 삼으려는 마당에는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되짚어보는
「어리석음」도 유용하지 않을까. 이런 입장에서 보면, 시화호의 비극은 박정희(朴正熙) 정권 이래 군부 권력의 「개발 지상주의」와
책임행정을 도외시한 관료들의 「무사안일주의」가 빚어낸 합작품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반월만은 적지(適地)였나
박대통령은 78년 3월29일 중앙청 국무위원 식당에서 경제관계 장관과 경제 4단체 대표들과 오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중동에
나가 있는 대형건설장비들을 서해안 일대에 대대적으로 투입, 농경지 축산단지 공업단지 등을 일구는 방대한 국토확장사업을 전개할
구체적 방안을 관계부처와 업계가 마련해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앞서 농림부는 75년부터 서남해안 간척농지 개발사업을 위한 「적지(適地)조사」라는 기본조사를 해오고 있었다. 반월만은
일찌감치 「적지」로 선정돼 기본조사가 84년에 끝났다. 특히 82년부터 84년까지 집중적인 조사가 실시됐다.
시화방조제를 막아 바닷물을 민물로 채운다는 첫 아이디어는 농림부에서 나왔던 것이다. 82~84년 당시 책임자였던 농림부
박종문(朴鍾汶) 장관은 지방에 내려가 있어 연락이 닿지 않았고, 농진공 최영식(崔永植) 사장은 연락처를 찾지 못했다.
84년 3월부터 90년까지 농진공 사장을 맡았던 한건희(韓健熙) 사장은 『최초의 아이디어는 70년대 적지조사를 실시했던 어떤
기술자로부터 나오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당시만 해도 쌀 수확을 놓고 포상을 하는 등 논과 공장이 들어설 땅과 물,
식량을 확보하는 것이 국민의 가장 큰 관심사일 때였다』고 회상했다. 또 『퇴임시까지 주변 어민들에 대한 보상분쟁으로 공사가 지연돼
이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지 장차 발생할 환경문제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90년대 초부터 시화호 공사에 간여했던 구강회 농진공 대단위사업처장은 『75년부터 농진공 「간척자원부」가 적지조사를 했고 조사자는
수십명에 달했다』며 『당시에는 시화호 주변에 공장과 도시가 들어선다는 계획도 없었고 흘러드는 지천의 수량도 많고 맑아서
자연스러운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농림부는 84년 8월 건설부 등과 시화호 간척사업을 위한 공유수면매립면허 협의에 착수했다. 농림부와 농진공은 85년, 86년에 방조제 실시설계를 완성했고, 현재의 시화방조제는 이 설계도대로 건설됐다.
시화호는 과연 「적지」였을까. 농림부 설명을 수용하더라도 적지조사팀은 10여년 뒤를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 건설부산하
산업기지개발공사(수자원공사로 개칭)는 77년부터 주변에 반월공단과 안산1단계지구 부지 조성공사를 하고 있었다. 시화호의 운명은
여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이곳에 부실시공된 하수관 등이 장차 시화호를 오염시킨 「주범」이 되기 때문이다.
96년 서울방송이 썩어가는 시화호를 보도하고 여론이 들끓게 된 뒤 공식적으로 모든 책임은 수자원공사가 지고 있다. 반홍섭
안덕건설부장은 『사업 시행자로서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런데 농림부와 농진공이 설계까지 마친
시화호에 건설부와 수자원공사가 왜 끼어들었을까.
졸속 국토확장사업
농진공 구강회 처장은 『반월만은 서울과 인천에서 가깝고 간척사업을 하기에는 천혜의 조건을 가지고 있어서 당시 농지를 만들자는
농림부와 공단과 도시를 만들자는 건설부 간 경쟁이 치열했다』고 말했다. 농림부에 넘어가는 반월만을 탐낸 건설부는 84년 11월
농림부의 공유수면매립신청에 대해 『해안매립 장기 기본계획이 확정되지 않았다』며 불허하고 『시화지구 매립추진을 관계부처가
협의하자』고 제안했다.
농림부와 건설부 청와대의 협상 결과 불과 2년여뒤인 86년 7월 시화지구 개발사업 시행방안이 확정된다. 내용인즉, 이 지역을
시화1단계(시화호 윗부분에 시화공단조성과 방조제 건설)와 시화2단계(시화호 아랫부분에 도시개발과 농지조성·2001년 이후
개발예정)로 나누어 수자원공사가 공단과 도시, 방조제 건설의 시행자가 되고 농진공은 농지조성 시행자가 된다는 것.
이때부터 시화방조제 건설 시행자는 수자원공사가 되고 농진공은 공사 감리를 담당하게 된다. 시화호의 아버지인 농진공은 이때 동생뻘인
수자원공사에 「아들」을 맡겼다가 12년 뒤인 98년 12월 「친권」을 포기한 꼴이다. 농진공은 96년 시화호 오염이 문제되자
『우리는 수자원공사에서 사업을 용역받아 단순 감리업무만 했을 뿐』이라며 발을 뺐다.
외곽시설인 방조제 공사는 87년 6월10일 시작됐다. 착공식에는 이규효(李圭孝) 당시 건설부장관과 이희근(李喜根) 산업기지개발공사 사장 등이 참석했다.
건설부가 시화호 개발사업을 이처럼 급하게 추진한 데는 경제계와 청와대의 재촉도 크게 작용했다.
환경부는 98년 2월 정권인수위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대통령이 84년 경제계의 간척사업 추진건의를 받은 뒤 청와대 경제수석이 재촉하는 등 건설부가 사전에 충분한 준비없이, 시한에 쫓기면서 사업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건설경기로 먹고 살게 해 달라는 경제계의 아우성과 전두환(全斗煥) 정권의 『하면 된다. 되도록 빨리 하라』는 독촉에 떠밀려 건설부가 졸속으로 계획을 추진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김성배(金聖培) 당시 건설부 장관은 『전반적인 것은 기억나지 않지만 마구잡이식의 독촉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시화호
오염에 대해서는 『당시 환경이라는 것은 관심사항이 아니었지만 이후 보도를 보면서 좀더 철저하게 환경계획을 세우고 유지관리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미리 밝혀 두지만 이 시기의 언론 역시 시화호 비극을 막지 못했다. 당시 보도들을 보면 환경에 대한 개념이 없기는 정부나 언론이나
국민이나 마찬가지였다. 언론들은 바다를 막고 갯벌을 매워 공단과 도시, 농지를 만든다는 정부의 장밋빛 청사진을 여과없이
보도했다. 84년의 한 신문기사는 『서남해안의 개펄을 광대무변의 농경지로 일구어 국토를 넓히는 간척사업의 필요성이 절실히
강조된다』며 맬서스의 인구이론까지 인용했다.
80년대 말까지의 시화호 관련 보도에는 「서해안 지도가 바뀐다. 국토확장 대역사(大役事)의 현장을 가다」 「바닷물 막아
5000만평 땅을 건진다」 등의 르포나 시리즈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90년경에 와서야 시화호의 수질오염이 우려된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정부나 여론은 이를 무시했다.
여의도 20배만한 바다호수를 만들고 몇 개의 개천물을 그 안에 담아 민물로 채우자는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육지의 개천옆에서는 반월공단과 시화공단, 안산시가지를 만드는 공사가 함께 진행됐다. 모두 수자원공사의 작품이었다.
둑 먼저 쌓아라, 흙 떠내려 간다
96년 감사원 감사결과 이때 매설된 도시와 공단 오수관(폐수를 하수처리장으로 보내는 관), 우수관(빗물을 모아 시화호로 방류하는
관)들이 일부 부실시공된 사실이 밝혀졌다. 공장과 가정 폐수들이 빗물관을 타고 시화호로 쏟아져 들어갔다. 안산시는 공장내
폐수방류관을 땅속 빗물수집관에 끼워 박은 공장들을 그대로 준공 허가했다. 돈에 눈먼 공장들은 밤마다 불법 폐수를 시화호로
토해냈는데도 환경부와 지자체는 이를 철저히 단속하지 않았다.
수년 뒤 벌어질 이런 상황을 막을 수 있었던 유일한 브레이크가 바로 환경영향평가였다. 87년 당시에도 환경보존법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이 법에는 지금의 환경영향평가법처럼 대규모 건설사업을 할 때 공청회를 열어 주민의견을 수렴하거나 약속을 어길 경우 환경부가
공사중지명령을 내리는 등의 강제조항이 없었다. 환경의식 못지않게 법도 미비했던 것.
수자원공사는 사업 실시계획 승인 신청전(86년 9월)에 환경부와 환경영향평가 협의를 해야 했으나 87년 3월에야 협의신청을 했다.
그나마 내용부실로 신청을 거부당해 정식 신청이 접수된 것은 공사시작 4개월뒤인 87년 10월이었다. 그러나 당시 환경청은 법을
어긴 관계자들을 처벌하거나 공사를 중단시킬 권한이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은 환경평가의 내용. 당시 환경평가는 사업자인 농진공 산하기관인 「농업토목연구소」가 했다. 96년 월간 「말」지에 이
문제를 다룬 자유기고가 이현숙씨는 『「제손으로 머리깎기」가 빚은 불량평가였다. 이 작업에 참가한 35명 가운데 수질분야 전공자는
한 명도 없었다. 토목연구소에서 나온 평가서가 토목공학적 관점에서 접근되는 것을 제어할 최소한의 장치도 없었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평가서는 또 96년 안산시 인구를 15만으로 예상했지만 96년 실제 인구는 55만명이었다.
한 해 뒤인 88년 9월20일. 환경청은 ▲하수종말처리장에서 처리된 방류수를 외해로 방류하되 해양오염이 악화되지 않도록 하고
▲취락지역이나 농경지 등에서 발생하는 영양물질이 다량으로 함유된 오수의 담수호 유입을 배제하고 ▲사업시행 후 호수내 물을
합리적으로 교체할 수 있는 배수갑문 운영방안을 수립하는 것 등 극히 원칙적인 조건을 달아 평가협의를 해주었다.
그러나 수자원공사는 환경영향평가 협의조건을 사업시행계획에 반영하지 않고 방조제를 축조해 수질악화를 초래했으며 상급기관인 건교부는 이를 방치했다(96년 감사원 감사결과).
감사원은 또 『건설부는 하수처리장 건설업무를 하면서 87년 2월28일 오폐수 1일 12만1000t 상당을 단순 침전처리하는
1차시설로 준공된 안산하수처리장을 방조제 축조 이전까지 2차처리시설로 준공하기로 하고도 이 업무가 환경부로 이관된 91년
4월18일까지 공사를 전혀 하지 않아 결국 방조제가 축조된 94년 1월부터 4년이 지난 97년 12월에야 완공되게 한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 환경부 한강환경관리청은 7차례 환경평가 협의사항 이행을 점검해 하수처리장 미설치, 외해방류계획 미수립, 부영양화
방지대책 미수립 등 6개 항목 미이행사항을 3회에 걸쳐 지적했지만 「대역사」를 막을 힘도 의지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 주요 오염원인 반월공단과 안산 1지구 택지(90년초), 시화공단(92년 3월)이 준공돼 공장과 집들이 먼저 들어서기
시작했다. 94년 1월24일 시화호 방조제에 대한 최종 물막이 공사가 끝났고 호수안의 바닷물은 바다와 단절됐다. 수자원공사 반홍섭
부장은 『당시 오염방지시설이 완공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물막이를 않을 경우 이미 건설된 제방이 바닷물에 쓸려 내려가기 때문에
물막이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 바닷물에 공단과 도시의 폐수들이 그대로 방류됐으니 아무리 거대한 시화호라도 얼마 버티지 못했다. 그 실태는 96년 4월에야 여론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수자원공사 관계자들은 『수자원공사는 조직상 건교부 산하기관으로 지휘 감독을 받도록 돼 있지만 장관들이 사업의 세세한 사항에 대해
알았거나 기억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관계자는 『건교부는 원래 「개발」 외에는 모르는 부서이기 때문에 환경문제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환경문제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96년 시화호 오염문제가 터지자 비난의 표적이 된 당사자들은 수자원공사 사장들이었다. 이들은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시화호가 이렇게 된 것이 아쉽다』고 말했지만 당시 상황에 대한 기억과 이해의 폭은 달랐다.
시화호 방조제 공사가 막 시작된 후인 88년 6월부터 89년 3월까지 재직했던 이상희(李相熙) 사장은 『당시 폐수처리시설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구체적인 계획으로 실행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재직할 당시는 주변공사가 한창이었고
방조제는 없었다. 다만 직원들이 「여기서 저 멀리 바다 건너 보이는 대부도까지 방조제가 건설된다」는 보고를 받은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나는 시화호에 당시 건설부에서 부지를 물색중이던 신공항과 도시를 유치하고 싶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89년 4월부터 93년 3월까지 재직했던 이태교(李太敎) 사장은 『자료도 없고 기억도 잘 안나서 정확하게 말하기 곤란하지만
재직기간에는 바다를 완전히 막지 않은 상태여서 호수가 오염될 것이라는 생각도 못했고, 또 그것을 예상한 보고도 없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또 『당시 미래에 대한 예측을 좀더 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오염원인에는 오수관과 우수관을 잘못
연결하고 폐수를 무단 방류하는 등 지자체와 업체들의 잘못도 있었다』고 말했다.
시화호 방조제 최종 물막이를 했던 기간인 93년 4월부터 95년 1월까지 재직했던 이윤식(李潤植) 사장은 주요 오염원인이던 하수관
부실시공에 대해 『물막이를 한 뒤 오염원인을 찾아내느라 최선을 다했다. 하수관이 잘못 시공된 곳이나 손상된 곳을 찾는대로 다
보수하도록 조치했다.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그냥 둘 사람이 어디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87년 착공때부터 건설부와 지자체
등이 환경부담시설을 분담해 만들기로 했는데 우리나라는 예나 지금이나 환경에 대해서는 계획대로 투자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95년 1월부터 96년 12월까지 재직한 이태형(李泰衡) 사장은 『93년부터 수자원공사 감사직에 있으면서 내가 사장이 되면 아무리
돈이 들어도 정화시설을 갖추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환경에 돈을 쓰지 않으려는 안산시 등 지자체와 주민, 공장이 퍼붓는 폐수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또 『수자원공사에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각자에게 분담된 오염정화시설 설치를 미루고
단속을 하지 않은 건교부와 환경부, 안산시 등의 책임도 크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감사원은 96년까지 안산시가 안산하수처리장을 잘못 운용, 정화하지 않은 오수를 시화호로 흘려보낸 사실과 시화지역을 담당하는
환경부 산하 한강환경관리청이 오수를 무단 방류하는 염색업체 등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책임을 지적했다.
농진공 관계자들은 『우리는 단순 감리자였을 뿐』이라는 주장. 90년 3월부터 93년 3월까지 재직했던 농진공 김영진(金榮鎭)
사장은 『당시 환경문제는 거론되지도 않았고, 퇴직하고 언론에 문제가 되고 난 뒤에야 환경 대책이 미흡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시화호의 대차대조표
감사원 감사보고서는 이렇게 끝맺고 있다. 『시화호 수질오염 초래는 지역주민, 입주기업체, 건교부, 농림부, 환경부 및 안산시,
시흥시, 화성군과 한국수자원공사, 농어촌진흥공사가 포함된, 그 동안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는 환경보전 의식결여가 가져온 결과로
사료됨』.
당시 감사원은 관계 공무원 18명을 징계하고 하수배출업체 18개를 고발하는 선에서 조치를 마무리했고, 당시나 지금이나 시화호의
비극을 책임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검찰도 96년 환경운동연합이 관련 책임자 10여명을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한 사건에 대해
97년 12월 무혐의 처분했다. 검찰은 다만 『시화지구 개발사업의 결정, 시행은 국토개발을 위한 정책적 결정이라 할 것이고,
사업계획 또는 정책결정 과정에 부주의 또는 소홀로 효과적 대처를 하지 못하였다는 행정상 책임을 묻거나 정책적 비판은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기본적으로 시화호 오염문제가 여론화한 96년 이후의 관계자들에게는 이 문제를 해결할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들은 『시화호를 꼭
살려내겠다』며 갖은 방법을 써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시 정종택(鄭宗澤) 환경부 장관의 탄식처럼 『시화호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호수였던 것이다.
농림부가 시화호 물을 끌어다 쓰지 않겠다는 방침을 발표하자 다시 언론과 시민단체의 비난이 잇따랐다. 환경운동연합과 언론은 방조제
건설비로 5000여억원이 들어가고, 96년 문제가 터지자 수질오염 개선비로 책정된 4493억원 중 절반이 집행돼 모두
7500여억원이 낭비됐다고 주장했다.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이 일대에 대규모 농업단지와 공업지구를 건설해 신도시를 만들겠다던
정부의 계획도 자동적으로 물거품이 되고…』라고 썼다.
그러나 이 부분에는 오해가 있다. 시화호가 담수호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시화지구 개발 전체가 물거품이 되거나 방조제를 허물어도 될 만큼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도시와 공단 용수는 시화호 아닌 팔당호에서 끌어오게 설계됐다.
이 사업으로 4038만평이라는 국토가 새로 생겼다. 또 방조제를 쌓아 서해의 간만조차를 없애 매립지에 들어가는 흙의 양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 수자원공사의 설명. 이제까지 개발된 시화1단계와 안산지구의 경우 방조제 덕택에 매립높이를 4m 낮춰 9500억원의
매립비용이 절감됐고, 2001년 이후 개발될 시화2단계에서는 4조1800억원이 절감된다는 것이다.
수자원공사는 또 이 땅에 공장을 유치해 발생하는 공업생산력은 85년 기준으로도 15억2500억원이라고 추산했다. 방조제를 허물 경우 이 땅 대부분이 물에 다시 잠기게 된다.
한편 96년 수질개선 대책 마련을 위해 책정된 돈도 터무니없는 낭비라고는 볼 수 없다. 민물이건 바닷물이건 호수 오염은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돈은 수자원공사와 지자체가 분담하고 시화호 주변 하수처리장을 증설하는 등 오염방지시설에 투자된다. 낭비라면
지난해까지 집행된 1411억원 중 담수호를 전제로 사용된 12억원 정도라는 것이 공사측의 설명.
갯벌도 국토다
물론 새로 생긴 4038만평의 「국토」만큼 아름다운 우리 갯벌이 사라졌다. 갯벌은 돈으로 따질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환경운동연합 장지영 팀장은 『경제적으로만 따져도 갯벌은 농지보다 3.3배의 가치가 있다. 그외에 환경 정화능력이나 관광자원,
바닷새 서식 등 갯벌의 기능과 가치는 말로 다 할수 없다』고 말했다. 갯벌도 소중한 국토의 일부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늦게
알아버린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바닷물로 채워진 시화호를 앞으로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 환경부 수질정책과 정종선 사무관은 『시화호의
미래가 빨리 결정돼야 담수호를 전제로 한 수질개선 계획을 수정하는 등 환경대책을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재 관련기관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우선 방조제 일부를 고쳐 인천과 같은 갑문식 항만을 만들자는 주장이
있다. 국회 해양수산위 김종배(金宗培) 의원은 96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이 지역을 환경친화적인 항만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해양수산부는 현재 이 방안의 타당성을 용역 조사중이다.
이 밖에는 서해의 조수간만 차이를 이용해 방조제에 조력발전소를 만들거나 깨끗한 해수호를 조성하고 부근에 해양스포츠단지 등 레저단지를 만들자는 안 등이 있다. 모두 개발을 전제한 방안들이다.
시민단체들은 시화호의 갯벌을 살리는 방안을 배제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장지영 팀장은 『네덜란드의 경우 과거에 만들었던 간척지를
포기하고 갯벌을 되살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며 『시화호도 정부와 민간단체, 환경 전문가 등이 참여하는 공동대책위원회를 마련,
합리적인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단체는 올해 「갯벌 국립공원 추진운동본부」를 설치해 시화호를 포함한 서남해안 갯벌 전체를 국립공원으로 지정하자는 운동을 펼칠 계획이다.
시화호의 비극에 비춰보면 전라북도의 새만금사업 재검토 방침은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시화호와 마찬가지로 담수호 조성을 목적으로
추진중인 새만금 방조제는 무려 33㎞나 된다. 호수의 면적과 저수용량은 시화호의 대략 2배. 주변 여건상 시화호보다 7배나
오염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환경운동 관계자들의 주장.
9년째 공사를 벌여온 농림부와 농진공은 전북도지사의 일방적인 사업 재검토 발표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나
관련 기관들은 이미 퍼부은 8000억원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할 듯 싶다. 이 사업이 강행될 경우 투입될 예산은 20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때 또 다시 시화호 같은 비극이 발생한다면 또 누구를 탓할 것인가. 지금은 9년 전과 다르다.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자연(自然)이 더 가치있는 시대가 됐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2/nd99020230.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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