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5일 수요일

소리꾼 아저씨

상여는 이제 안해.
원래 어떤 여자한테서 배웠더랬어. 그 여자가 모든 자료를 주었지. 글도 주고.노래도 알려주고. 그 여자한테서 받은 것을 서랍장안에 넣어뒀었는데 우리 엄마가 그 서랍장을 연다고 그러다가 불을 내버렸어. 홀랑 다 타버렸지. 그래서 난 그 글을 다 외우지도 못해. 그냥 대충대충 일부분을 불러주는 흉내를 내는거지. 상여가 뿐만 아니라 다른 것도 하지. 원래 난 잘 모르고 김복동씨라고 있어. 그분을 찾아가봐. 그분이 제대로 배운 분이지.

내가 총각때부터 사회부장도 하고 오락부장도 총무도 하고...내가 여기 대부도에 한 12대를 살았는데...83년도에 새마을지도자 어촌계장을 했고, 88년도에 이 시화호가 막히는  바람에 그만 두었고 96년도 1월 1일자로 동사무소 직원으로 들어갔어요. 근데 이 대부도 유래가 아주 의붓자식이여. 남의 아들을 의붓아들이라고 하잖어. 이 대부도가 마한에 있다가... 부천에 있다가, 옹진군에 있다가 이런식으로 의붓자식노릇을 했어. 근데 옹진군은 아직까지도 살아있다고요. 지금도 현재. 그러면 왜 대부도만 딱 떨어트려놓고 옹진군은 살아있는데 왜 흡수를 안시켰냐 이거요. 그러니까 너네 의붓자식은 항상 의붓자식 노릇을 해라 하는 식으로 하는 거요. 그러면 어디로 갈꺼냐? 시흥으로 갈꺼냐 화성으로 갈꺼냐 안산으로 갈꺼냐. 95년도 12월 25일자로 주민 투표를 해갖고 0.1 프로로 안산으로 들어간거라. 그러니까 안산으로 들어가다 보니까 거기 중소도시 계획식으로 번창만 해나가는 식이지 돌봐주는 것이 없다고. 그러니까 옛날부터 이 '옹진에서는 대부도에 가서 있는척 하지말고, 여흥가서는 먹는 척하지말고, 덕적도 가서는 아는척 하지 말라.' 라는 말이 있어. 옛날부터 대부도에서 한해동안 농사를 져갖고 외지를 나가지 않으면 6년을 먹고도 남는다고 했어. 여흥같은 데는 전기가 대부도보다 늦게 들어왔어요. 그래서 여흥도에는 그전에 가면 이 소주를 시첩으로 달여서 먹어. 그래서 거기가서 먹는척 하지 말라고하고. 이 덕적 같은데를 가면 예전에 여자들 고무신 있죠? 고만한 거 하나 갖고도 고기가 흔해갖고 낚시질을 하면 많이 잡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팔아서라도 대학교를 보냈기 때문에 아는채 하지 말아라라는 전래여. 젊었을 때 이 모든걸 암기를 하면 잊어버리질 안잖아요...그런데 나이가 어리고 할때 나는 그 동네에 대부도가 동네가 20개 부락이라고.

(제가 이해하기론 아저씨께서 연애를 하셨는데, 그 여성이 소리꾼이셨던듯...근데 어머니가 그걸 알아채고 아저씨께서 숨겨놓은 그 여성과 찍은 사진과 소리가사가 든 종이를 다 태우셨다고)

그것만 안태웠으면 내가 자세히 다말해줄 수 있는데...그때 당시 공책 8장자리 앞뒤고 16장을 베껴서 내가 다외었는데 세월이 지나 다 잊어버렸어. 그래서 중간중간에 기억나는 것만 하는 거야. 내가 대부도에서도 상여가뿐만 아니라 개업식초청하면 고사지내잖아 그런것까지 다 했지. 상여나갈때도 이제가면 언제오나 이런식으로 하는거지. 초상나면 한두시간 하는게 아니야. 안하다가 한번하면 술먹고 목청 크게 돋아야하니...그거 한번 하면 이틀날 목이 잠겨서 말도 못하고 그래. 근데 대부도에서는 소리하는 분들이 많아요. 탄도가면 쌍둥네들이라고....그 사람도 나하고 동갑인데, 올해 7학년 3반인데, 그 사람들도 몇형제가 소리르 다해 . 대부도가 다 그래. 우리 형님이 돌아가셨을 때 내가 돈주고 그 사람들을 사왔다고. 다른 동네에는 내가 돈을 받고 가. 그런식이 되는 거요. 그런데 지금은 화장 문화가 생겨서 10사람이 돌아가셨다면 1사람이나 할까 말까여.  옛날에는 다 했지. 지금은 대부도가 20개 부락인데 갈마지에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어. 그러니깐 저 사람이다라고 하고 초상나면 내가 팔려 가는 거지. 상여같은걸 그동네 사람들이 꾸밀줄 몰라 내가 다 꾸며주곤 했지. 그런데 지금은 화장문화 때문에 동네 사람이 돌아가셔도 안해. 화장하면 납골당 아니면 나무에 갖다가 뿌려.

시화호가 생겨서 대부사람들은 망한거여. 다리를 놓고 했으면 물이 훌라들이쳐갖곤...나도 어촌계장을 했는데 그때 당시는 해물이 다 못해먹어요.
바다가 이 동네하고 저동네하고 경계선이 여기고, 이 동네는 사람은 여기서만 저동네 사람들은 저기서만 잡은 거지. 낙지고 굴이고 어마어마하게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없다고.
전에는 탄도 같은데가 저쪽 사람들이 잘 못잡으면 구정때 같은데 오라고 해서 한포대씩 해산물을 주곤 그랬는데 지금은 불도, 탄도 다 갯벌이 없어졌지. 그전엔 해물이 너무 흔해갖고 굴 같은것도 한번에 다 못먹었지. 없는게 없었지. 어촌계장시 갯지렁이가 잡아서 일본에 수출하곤 그랬는데 지금은 씨가 말라버렸지. 대부도 모든게 죽어버린거지. 다리 만들면서 천만원 보상받았다 그러면서 좋았지만 땅은 평생 변하지 않아도 돈은 금방없어지는거여. 대부도에서 망한 사람 많아요. 지금도 대부도가 공기가 좋잖아요 밤에 별이 보이잖어.

(부인에게서 전화 옴) 마누라가 골다공증에 류마티스 관절염에 그랬는데. 뼈가 부러져 병원에 갔더니 그 이틑날 수술을 해야한대서 뼈를 빼고 인공뼈를 박았다고. 병원비가 돈천만원 나왔는데 지금 혼자 내가 밥해먹고 나오고, 짐승 (개 닭 염소)도 키워야하고 포도밭도 있고 골아파.  아주 사는거라곤 괴로워. 그전같지 않고 나이먹으니까 이렇게 24시간 근무하고 집에가면 녹초가 되서 쓰러져. 농사일이라고 한번하면 더 힘들지. 마음은 40-50대인데 몸은 그렇지 않아요. 나도 벌써 딸이 50이 다되고. 딸 하나야. 그리고 아들내미는 55, 39이야. 아들둘 딸 하나. 외손녀 딸이 25이야. 대학교 졸업한지 3년되었지.

원래가 대부사람은 인천에 한가닥이 다 있었어. 안산으로 편입되어도 여긴 아직도 전화번호가 032이야. 안산은 031이지. 대부도에서 세금걷는 걸로 안산사는 사람 먹여살린다고 하니 대부도를 다시 인천으로 보내주겠어? 안산에서 안놓아주는 거지. 대부도 사람들이 애당초 미련한거지. 대부도에서 시화방조제 건너가면 시화요. 이짝으로 가면 화성이고. 멀리 떨어진 안산으로 편입된 거지. 시흥시 거쳐 화성시 거쳐 가는 안산이요.애당초에 시흥이나 화성으로 편입되었어야지. 대부도 농촌진도소가 있었는데 안산 중소도시에 편입되면서 그게 없어졌어. 풍도도 대부면 풍도리인데, 그것도 이상하지. 선재와 여흥도가 있는데 여흥대교가 서해대교랑 공법이 똑같애. 대부도에서 선재 다리가 있어. 여흥 화력발전소 때문에 다리가 생긴거지. 우리세대 때 윗사람들이나 나같은 경우에도 국민학교 다닐때 시험을 보고 들어갔는데, 난 시험봐서 2학년으로 올라가서 5년만에 학교를 졸업했지. 근데 만약 시험에 떨어진 사람들은 대부도에서 선재학교를 다녔어. 선재 뱃길과 물이 나가면 강을 건너서 다녔다고. 3-4학년되면 다시 대부도로 전학을 왔고. 현재 여흥에서 풍도가려면 배로 20분, 대부도에서는 풍도에 배타고 가면 한시간이 걸려. 그런데  풍도를 여흥에  편입시켜야지 대부도에 편입을 시켜? 그리고 선재를 대부도에 편입시켜야지 여흥에 편입시키고. 지금 창작센터 좌측 모래하치장있는데 이게 풍도에서 퍼오는 모래야. 그돈이 안산시로 들어가기 때문에 안산에서 놓지 않는거지.

여관: 다리가 생기면서 많아졌지. 옛날에는 안산시로 편입되기 전 옹진군일때 여관허가를 다 내준거지. 안산시로 되면서는 여관 허가를 하나도 내준게 없어. 옹진군일때 허가내서 그때 못지으면 일년 연장해서 다 지은거지. 그런데 여관이 잘 되는게 없어서 지금은 양로원이 되기도 하고. 대동초등학교 위 양로원도 원래 여관이었어. 쌍계사라고 내가 그쪽 북동에 사는데 올라가기전 우측에 여관이 있는데 옛날엔 다 논이었고, 지금은 손님을 받아 타산이 안맞아 덤프트럭 갖다놓고 월 몇십만원(25-30만원)에 자고 먹고 하게 만들어 버린거지.
여관이 원래 다 논이었어.

창작센터 옆 팬션타운: 서울사는 상해군들이 80년대에 다 먹어버린거지.둑을 막아 바다인 곳을 매꾸어 만든거지.서울 상해군인들이 동사무소가서 다 뒤집어 놓고 그런거지.

대부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여. 내 이름이 잘 알려진 이유는 동사무소 직원이었고 2000년 정년퇴직을 했는데 그 안에 복지담당에서 묘지 관리를 했었지. 묘지관리때는 세월이 좋은 거요. 동사무소에서 일하면서 묘지관리했으니 초상나면 일거양득이었지. 그런데 대부에 공동묘지가 8군데였는데 묘지가 계단식이 되어서 내가 그 시설을 한거지. 말봉에 남일, 신당리 2군데만 남았어. 외관상 보기 나쁘다고 해서 솔나무 심어서 공동묘지를 다 가리고 더이상 쓰지 않지.  창작센터 및 기와집이 원래 고아원이었어. 그리고 가다보면 허브모텔 가기전이 고아원 공동묘지였어. 지금은 뼈도 안남았지. 창작센타 및 기와집이 고아원 원장집이었어. 그 기와집마루 밑에 구멍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 메꾸었어. 배가 없으면 옛날에 여기서 나가지도 못했어요. 굶어서 죽는 애들이 허다했지. 먹을 거 없으니 헤엄쳐 나가다 죽고. 그럼 그 뼈 담아다 여기다 놓고. 지금은 아카시아나무만 무성하지.

69년도에 식구들이 여기 있고 난 인천 가서 방위 생활을 하게 되었어. 대한민국 초창기 방위생활. 쌀한가마 80키로짜리가 3500원, 그걸 8가마를 팔아서 빽서서 방위 들어갔지. 경찰서 옆에 파출소에 들어갔지. 외국사람만 들어가는 클럽. (8-9시 스트립쇼) 그 클럽 아들이  같은 방위했어. 방위복 입고 그 아들 덕에 들어갔지. 대부도 선감리 고아원 출신을 만남.

시화호 건설 후: 망한 사람은 외부로 다시 나가버렸지. 대부도가 1/3은 외지인에게 넘어갔다고 봐야해. 임야나 뭐나. 농사 안짓는 땅이 많어. 휴경지 벌금을 물린다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나무도 심고 그러는데가 많아요. 그러게 시화호 막어 대부도 망한거요.

포도농사:포도농사도 옛날 이야기이지. 이제 모두 상품화 되어야지. 포도 박스가 10kg, 5 kg가 있어요. 옛날에는 10키로 박스만 있어서 아래에는 나쁜거 담고 위에만 좋은거 담아 파는 식이어서 이미지가 흐렸어요. 화성포도가 외국에 수출하고 그러는데, 대부 포도는 그러질 못해요. 자기가 노력을 해서 상품화 시켜야만 농산물도 성공하는 거지. 현재 아마 한두사람은 조금있음 포도가 나와요. 그럼 5 키로에 5만원이야. 그러다 자꾸 포도가 나오면 4만원, 3만원 이런식으로 되요. 흔해질수록 싸지는 거죠. 애당초에 5만원짜리 나올땐 제맛도 아니야. 농익어야 제맛인데. 제맛도 아닌데 비싸니 특별한 사람들만 사먹지. 오래 지날수록 가격도 떨어지고 맛도 좋아지고 그렇게되지. 외지사람이 포도밭사면 아무렇게나 농사해서 아무렇게나 담아서 시화방조제 끝에서 만원 거리면서 팔아서 그런 이미지 때문에 다른 사람도 피해받는 거요. 지금 대부도는 외부사람이 설치고 있어요.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 이런말이 있는 거요. 외지 사람이 들어와서 현지사람들 못산다 그거요. 방아머리 칼국수집 다 외지 사람들이 하는 거요. 대부사람이예야 한두사람. 다들 전라도 사람들이 하는거지. 지금은 칼국수 바지락도 국산이 없고 중국산이나 북한산이여. 바지락이 질기고 맛이 없지. 횟집들도...광어 역시 양식이지 자연산이 없어요. 자연산 먹기가 하늘에서 별따기요. 시화호에 숭어가 500키로 5000키로를 잡아요. 왜 그렇게 잘 자라고 많냐? 안산 시흥 화성 오물이 다 시화호로 오는거요 다 똥물이지. 멀쩡한 강물에는 그렇게 물고기가 잘 자라지 못하지. 소라같은 것도 여긴 이만하고 그안에 든 알맹이도 크지. 그 안에서 잡는 사람들은 그것들 안먹어. 소래나 연안 어시장으로 넘기지 자신들은 안먹어. 망둥이도 서해바다의 것은 요만한데 여기것은 이만해. 사강 시장가서 망둥이 보면 시화호에서 잡은 거야. 바지락 젓을 해서 파는걸 보면, 바지락 젓국이 노래야 원칙인데 똥물이야. 물이 오명된 곳에서 자란 것이기 때문에 똥물이 나오는거지. 시화방조제 안에 물이 들어가면 돌아서 나와야 하는데 지금은 물이 쭉 들어갔다 밀려 나오기만 하지 순환이 안되. 다 그런식이 된거지. 말도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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