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1일 목요일

선감마을 부녀회장님 댁

부녀회장님: 원래 인천에 살다 엄마랑 둘이 조용히 살고 싶어 대부도에 들어왔다. 그런데 대부도를 신씨 집안이 꽉 잡고 있는데 신씨 가문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대부도에서 내쫓는다기에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 내가 시집왔기때문에 친정이 그래도 먹고 살았다.
예전에는 보릿고개가 있었고 보리농사를 지었는데, 보리 타작을 할때 뾰족한 것들이 온몸에 달라붙어서 내가 힘들어서 우니까 시아버지가 다음부터는 보리농사 안짓는다고 하셨다.보리농사 다음에 콩농사를 지었다. 콩농사 역시 힘들다. 콩털때 털이 몸에 붙어서 아프다. 지금은 옥수수 배추 고추농사를 짓는다.사람마다 맞는 음식과 안 맞는 음식이 있듯이 농사도 마찬가지이다. 농작물, 땅, 등에 따라 모두 다 다르다. 우리 집은 포도는 안 하지만 수확 철에는 여기저기서 갖다준다. 고마워서 종종 포도 싸는 일도 돕기도 하고 한다. 농사라는 게 그렇다. 농사 지을 때에는 너무 힘들고 그래서 절대 누구 안 줄 것 같지만 다 짓고 결실을 보면 그렇게 나누어 주게 된다.

밤에는 방아머리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일하기 때문에 농사지을 시간이 많이 없어서 포도농사는 짓지 않는다. 포도농사는 손이 많이 가서 혼자 지을 수 없다. 옆집은 배추농사가 안되기 때문에 자기네 배추를 사간다. 자신의 배추는 길이가 길고 잎이 많아서 김장하기에 좋다. 길이가 짧으면 배추대가리를 짜르면 남는게 없다. 올해는 고추농사를지었는데 천오백그루정도 지었다. 내년에는 이천그루정도 지을 예정이다.

어제는 게장 게 양념무침 탕 바지락 파전 등 요리 방송을 위해 했다. 김치를 만들때에는 대부도에서 포도가 많이 나니 와인을 넣으면 맛이 좋고 깍두기를 담글때에는 소주를 넣으면 아삭아삭하다. 경연대회는 몇년 전 은상을 탓다. 그때는 낚지 요리를 했다. 첫째 아들 손녀는 배우다. 둘째 아들 손녀는 아직 아기이지만 모델이 되기를 원한다. 눈에 쌍커풀이 없어서 걱정이다. 아기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자신을 제일 좋아한다. 일이 고되지만 손녀만 생각하면 눈에 아른거려서 보고싶다. 저녁 9시 반쯤 방아머리에 있는 가게에 가려고 운전을 하면 그때 너무 졸리다. 밤에는 가게일을 하고 낮에는 밭일을 하고 손주도 보고 잠을 거의 못잔다.

이 집에서 산지 20년이 되었다. 그당시 이 주변에 집이 한개도 없었다. 문이 확터져서 바다바람이 불어 시원하다. 우리집은 모두가 일한다. 나도 슈퍼에서 일하기 때문에 남편도 일하고, 아들들도 집안일을 한다. 난 며느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는다.

이 바다가 다 굴이었다. 밟으면 자빠질 정도로 굴을 쓸어 담았다. 옛날에는 그 굴을 안팔고 다 까서 알맹이로 팔았다. 첨왔을 때 시집안가려고 우리 엄마랑 살려고 온건데 신씨네 집안이 세. 신씨들이 많아서 세. 일루 시집안가면 우리집을 내쫓는다고 그랫어. 아무나 못들어왔어. 동네마다 도장 받아서 다 승낙해야만 이곳에 살수 있었어. 왜냐하면 아무나 여기들어와 갯것 해먹고 그럴까봐 동네사람들이 허락해야지만 살수 있었어. 근데 지금은 아무나 들어와서 땅만 사면 살수 있잖아. 근데 바다는 못나가. 어촌계가 있어서 어촌계 회원만 들어갈 수 있어. 요즘 갯것이 많이 죽었지만 그래도 바지락은 많어. 일년에 몇번씩은 해요. 매일은 안하고. 자연산이어서 바지락이 비싸서 다른 곳 바지락이 모자라야 여기것을 가져가. 비싸서 안사. 어촌계가 아니었던 사람이 어촌계하려면 안 넣어줘. 몇대째 살아도 어촌계 가입한 사람은 100명정도 밖에 안되. 지금 굴맛은 예전 굴맛이 아니야. 향긋한 냄새가 없어. 세제가 정화조에 안거르고 그냥 나와서. 그리고 김쌀에다가 염산을 써. 김공장이 이곳에 있잖아. 


신씨네 집안 남편의 형: 옛날에 통신공사에서 일을 했다. 지금은 인천 어느 아파트에서 경비를 한다. 통신공사에서 일할 때 여기저기 많이 다녔다. 영종도 옆에 어느 섬은 북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거의 다라 다들 이북말을 쓴다. 나는 그냥 통신공사 일 때문에 갔는데도 사람들이 그렇게 의심을 하더라. 어떤 섬은 정말 아름다워서 사람이 살고 싶어질만 한데, 여전히 무인도이다. 이유가 따로 있다. 미군이 들어갔던 적이 있는데 한 미군이 엄청나게 큰 뱀을 쏘아 죽였다. 그러자 그 이튿날 다른 뱀에게 목이 졸려 죽었다. 그래서 바로 미군이 철수했다. 그렇게 뱀이 많아 사람이 살 수가 없는 곳이다.
옛날부터도 인천과 대부도 사이에 배가 다녔다. 60년대 초반도 마찬가지다. 그 때는 목배였던 것 같다. 배가 많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있었다. 한 배에 200명도 타고 그랬다.옛날에 우리 어릴 적에는 바지락이니 굴이니, 해물이 그렇게 맛있었다. 지금 먹는 것들은 비교도 안 된다. 방조제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옛날이 더 낫다.
방조제 연결 이후로 어촌계가 강화되었다. 어촌계에 새로운 사람들이 가입할수는 없다.
60년대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와서 갯벌일도 할수 있었지만..

아버지께서 감투를 6개정도 쓰시고, 하인도 거느렸다. 할아버지 때문에 어머니가 고생이었다. 손님을 많이 초대하셨다. 길가는 갓쓴 사람이 지나가면 불러서 재를 넘어가면 집이 없으니 자신의 집에 초대해 하룻밤 묶게 하였다. 어머니는 손님치례를 많이 하셧다. 6.25전쟁나서 피난을 많이 왔다. 머슴 5이 있는 신씨네 집은 잘 살았다. 인민군이 들어와서 우리도 도망을 갔다. 인민군인데 자세히 보니 총이 땅에 끌리더라. 중학생 꼬마를 군대에 징집한 것이었다. 인민군이 들어와서 같이 농사를 지었고 감자나 콩을 수학하면 가족 수대로 나누어 먹었다. 서울 수복하면서 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활동사진(영화)를 보여준다고 하며 동네사람들을 다 모았다. 군인이 내려와 거기서 징집을 해갔다. 동네 이장인 자신 아버지는 서울 수복이후 인천에 끌려갔다. 빨갱이 앞잡이라고 추궁을 당했지만 자신의 집에 일하던 머슴들의 증언으로 아버지는 이장이었고 총을 겨누니 싸인을 한 죄 밖에 없다고 해서 풀려났다. 그당시 양복을 입고 계셨는데 그 양복이 고문받은 상처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아서 가위로 잘라냈어야만 했다. 아버지가받은 고문은 매맞고, 손톱 사이에 대나무 밖는 것, 마지막으로 드럼통에 물을 담고 바늘 구멍을 내어서 물이 아버지 이마에 떨어지게 하였다. 처음엔 시원한 느낌이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망치로 때리는 고통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는 선감원 총무셨다. 선감도 김씨, 이씨, 박씨가 많다. 아버지가 고아들 이름을 모르니 성을 지어서 학교를 지어서 아이들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래서 선감도에 김씨 이씨 박씨가 많다. 원래가 여기가 아니라 풍도가 선감학원 자리라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왜 선감학원이 선감도로 왔는지 안다. (나중에 말씀해 주시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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